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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원자

저자
마크 뷰캐넌 지음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 2010-08-14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사회적 원자에 대한 이해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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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뷰캐넌


1961년생. 1993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비선형 동역학 등의 연구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이론 물리학을 연구하며 과학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네이처>와 <뉴사이언티스트>에서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도 <뉴욕 타임스>를 비롯, 다양한 매체에서 과학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노르망디에 거주하고 있다.




책을 시작하며


토마스 셸링(Thomas Schelling, 1921~)은 1971년에 발표한 짧은 논문에서 인종 분리가 원리적으로 인종주의와 무관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극단적인 소수가 되기를 꺼리는, 비난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정도의 성향만으로도 체스판 위 동전들이 흑과 백으로 나뉜 것이다.




1. 사람이 아니라 패턴을 보라


"진보의 희망을 비웃는 것은 궁극적인 어리석음이며, 영혼의 빈곤과 정신의 비천함의 극치이다." - 헨리 루이스 멘켄


1974년에 인도의 인구가 5억에 이르자 인디라 간디가 이끌던 정부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로 결정했다. 1년 동안 800만 명 이상이 정관 수술을 받았다. 인디라 간디의 정부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괏ㄴ습, 신앙, 그들 자신의 희망에 반대하도록 개인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거센 저항에 부딪힌 정부는 강압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인도의 인구는 지금도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인도의 남쪽 끝에 있는 케랄라에서는 야만적인 강압이나 선전 없이 인구가 안정되어 있다.


케랄라가 달라진 유일한 이유는 교육이다. 그것도 산아 제한이나 가족 계획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일반적이 교육, 즉 읽기, 쓰기, 산수 교육이고, 특히 여성에 대한 교육이다. 1980년대 후반에 케랄라 정부는 (자원 봉사 단체의 도움으로)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대규모 운동을 전개했다. 말 그대로 수만 명의 봉사자들이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문맹자 15만 명을 찾아냈는데, 그중 2/3가 여성이었다.


3년이 지나거 UN은 케랄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맹률이 0인 지역이라고 선언했다. 1999년에 인도의 가족 계획 전문가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제 두 아이 이상 낳으면 놀란다. 7, 8년 전에는 세 자녀가 표준이었고, 이 정도로도 우리는 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두 아이가 표준이고, 교육이 높은 사람들은 하나만 낳으려고 한다."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케랄라에서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인구 폭발에 제동이 걸렸다는 데에 동의한다. 산아 제한과 가족 계획, 심지어 강제 불임으로도 실패했던 일을 교육이 해 낸 것이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여성들이 과거 50년 동안 교육을 받은 결과로 출생률이 서서히 낮아졌다. 이것은 전혀 신비로운 일이 아니다. 교육받은 여성들은 가정 밖으로 눈을 돌려 직업을 얻거나 사회 활동을 하게 된다. 케랄라의 예가 특이해 보이는 것은 변화가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흐름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힘들고, 흐름을 따라 움직이면 수월하다. 이런 이유로 한번 흐름이 생기면 다른 사람 역시 이 흐름에 포함되어 흐름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이 패턴이 사람들의 선택을 제한하고, 사람들이 패턴을 강화하는 쪽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흐름의 에너지와 영향력이 커진다.


개인의 행위가 사회에 작용해 실재를 만들고 그것이 다시 사람들에게 작용한다. 우리는 사회적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 때문에 흐름은 더 강해져 옆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은 채 패션 유행을 만들고, 젊은이들의 운동을 만들고, 신경질적인 집단 행동, 광신적인 교단, 민족주의적 열광, 주식 시장의 병적인 투기 열풍을 창조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우리는 숨겨진 사회적 흐름을 타면서도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서 사람들은 스스로 줄을 서서 어떤 의견을 옹호하거나 반대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것이 받아들일 만한지, 어떤 것이 바람직한지를 결정한다.


이 모든 사회 현상은 물리 현상과 아주 닮은 과정을 따라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물질을 이루는 부분들의 성질이 아니라 그것들의 조직과 패턴과 형태라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교훈이다. 이 교훈은 원자와 분자 수준에도 적용되고, 훨씬 더 높은 수준에도 적용된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 구성 요소로 사람을 '원자'라고 한다면, 이 '사회적 원자(social atom)'가 이루는 거시적인 패턴은 사람들 개개인의 성격과 별 관계가 없다고 기대할 수 있다.


자기 조직화의 핵심은 어떤 사물 또는 과정 A가 다른 과정 B를 일으키고, 이것은 다시 A를 더 많이 일으키고, 더 많은 B가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나선형으로 증가하는 되먹임이 진행되는 것이다. 주식 시장에서는 값이 떨어지는 주식을 사람들이 팔고, 따라서 값이 더 떨어진다. 한 사람이 소란을 떨면 다른 사람이 동참하게 된다. 공원의 잔디밭에 난 희미한 발자국을 보고 몇몇 사람들이 그 발자국을 따라가고, 그들이 밟아서 잔디가 더 뚜렷하게 패고, 이 자국을 따라 더 많은 사람이 잔디를 밟고 지나간다.


자기 조직화가 언제나 이득이 되지는 않는다. 1980년대 초반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통 당국은 한 노선에 버스를 여러 대씩 운행시켰다. 그러나 버스 세 대 이상을 노선에 투입하고 간격을 똑같이 해 놓으면, 버스의 간격은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앞서 가는 버스는 승객을 많이 태우게 되고, 따라서 정차 시간이 길어진다. 바로 뒤 따라가는 버스는 승객이 앞 차만큼 많기 때문에 정차 시간이 짧아진다. 이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뒤차가 앞차를 따라잡아서 버스가 한참 안 오다가 줄줄이 두 세대씩 한꺼번에 몰려오게 된다. 버스들이 자기 조직화 때문에 한꺼번에 뭉쳐서 다니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없애기 위해 당국은 같은 노선의 버스가 서 있는 것을 보면 그 버스가 정류장의 승객을 다 태우지 못할 것 같아도 그냥 앞질러 가도 되게 했다. 이렇게 하면 버스들이 한꺼번에 줄줄이 오는 것을 막게 되어 더 효율적으로 운행할 수 있다.


헬빙과 동료들은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탐구했다. 불이 나서 연기가 자욱한 극장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모형화한 것이다. 이 모의 실험은 한편으로 어릴 적에 누구나 배웠던, 이런 상황에서 '뛰지 마라.'는 교훈이 옳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람들이 뛰면 입구 주위가 혼잡해져서 사람들이 잘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고, 반대로 사람들이 천천히 움직이면 이런 혼잡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탁자가 입구 정면에서 3미터 안에 있으면 사람들의 흐름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어서, 탁자 때문에 자기 조직화의 패턴이 바뀌고 모든 사람들이 더 빨리 빠져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 조직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우고 이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게 관리할지 배우는 것이 당연히 사회 과학의 주요 과업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사회 과학자들이 써야 할 적절한 연구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셸링과 헬빙을 비롯한 몇몇 선구자들은 전통적으로 소수였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연구하는 사회 연구자들은 최근까지 거의 없었다.


사회 과학자라면 당연히 기본적인 사회 현상을 연구해야 한다. 사회 계급의 형성, 공동체 또는 기업의 '문화'가 사람들이 바뀌어도 계속 유지되는 이유 등을 말이다. 이것들을 설명하려면 사회 과학자들은 인간 행동의 기본 특성을 살펴봐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려는 경향과 주위 사람들에게 맞추려는 경향 또는 변화하는 세계에 빠르게 적응하는 능력 따위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의 작용으로 만들어지므로, 사람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살펴보면 사회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 과학자들은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연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한 가지와 다른 한 가지 사이의 '상관 관계'를 찾는다. 예를 들어 빈곤과 범죄율, 교육과 소득 사이의 상관 관계를 찾는다. 연결 고리를 찾으면, 그들은 하나가 다른 것을 '설명'했다고 말한다. 연구는 대개 여기에서 끝나 버린다. 사람들의 활동이 왜 그런 패턴을 만드는지 자세히 탐구하지 않고, 기본적인 인과의 매커니즘을 살펴보지 않는다. 빈곤은 개인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빈곤은 왜 범죄를 일으키는가? 이런 질문을 탐구되지 않는다.


경제 이론가들은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나 실재를 충실하게 기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산을 단순하게 하기 위해, 한 사람의 행동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즉 개인과 개인 사이의 상호 작용은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영원한 백기를 들고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저작을 헤집는 데 바쁘다. 홉스, 베버, 뒤르켐, 스마스가 한 말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그들의 말에 대해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따위에 대한 논란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마침내, 실세계의 혼란스러운 세부를 뚫고 올라와서 추상적인 이론으로 날아오르는 '장대한' 스타일의 사상을 좋아하는 광적인 사회 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이론은 실재에 대해 어떤 검증도 받지 않는다. 악명 높은 '포스트모더니스트'만큼 이런 것을 잘 보여 주는 사람들도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학파는 진리는 완전히 무작위이며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사회 이론은 얼마간 문예 비평과 비슷해진다고 주장한다. 누군가가 적어 놓은 것 중에서 의미가 고정되어 있거나 진정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독자들이 마음대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영국의 역사가 제프리 엘턴(Geoffrey Elton)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적으로 갈라진 틈"과 같아서 이 유혹적이고 아무거나 다 된다는 식의 이론화에서 저자는 정합적으로 생각할 의무조차 없다.


이런 식의 사회 과학은 이제 빠르게 역사의 유물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심리학 분야에서 이뤄진 훌륭한 실험 연구가 수십 년 동안 쏟아져서, 인간 행동의 많은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사회적 원자'는 꽤 단순한 규칙을 따를 때가 많다. 둘째, 과학자들은 사회가 복잡한 이유가 개인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하면서 종종 놀라운 방식으로 패턴을 만들기 때문임을 배우고 있다.


사람보다 패턴이 더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탐구하면서, 우리는 금융 시장의 논리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며, 어떤 생각 하나가 퍼져 주류가 되고,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주가의 폭락과 반등이 왜 일어나는지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루머, 유행, 히스테리의 파도가 거의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볼 것이며, 우리의 집단적인 행동이 놀랍도록 정밀하게 수학적 패턴을 따르는 것을 볼 것이다.




2. 인간이라는 문제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이렇게 썼다. "과학적 사고의 목적은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보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을 보는 것이다."


니체는 너무 많은 철학자들이 먼저 자기가 믿을 것을 결정한 다음에 이유를 찾는다고 말했다. "철학자들은 결국 가정, 육감, 진정한 '영감' 따위(여과되고 추상화된 마음의 욕망일 때가 많다)에서 나온 견해를 이성으로 방어한다. 그들은 편견을 싫어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편견을 '진실'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대변하는 교활한 대변인들이다."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의 맥락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지적했다. 세상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한히 많은 사건들이 얽혀 있고, 이 사건들 중에서 일부를 골라내서 줄을 세우는 우리의 능력을 유한하다. 역사는 어떤 종류의 취사선택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역사 연구에 편향이 나타난다. 카가 말했듯이 역사 서술의 기초인 '사실'의 기록은 역사가의 선택을 반영한다.


"현대의 씌어진 중세의 역사를 읽어 보면 중세에는 종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되어 있다. 우리가 중세사에서 아는 사실은 거의 모두 종교의 이론과 실제를 직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선택한 것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가 최고로 중요하다고 보았고, 종교에 관련된 것이면 모두 기록했다."




3. 인간의 사고 본능


1960년대에 컬럼비아 대학교의 경제학자 게리 스탠리 베커(Gary Stanley Becker, 1930~)는,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도덕적인 이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려 깊은 분석 끝에 범죄가 최상의 선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다 할 돈벌이 재주가 없는 사람은 직장을 구하기보다 자동차를 훔치거나 길거리에서 할머니에게 돈을 빼앗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베커의 '합리적 선택'에 따르면 범죄는 또 다른 형태의 사업일 뿐이고, 벌금과 감옥행은 어쩌다 지불해야 하는 비용일 뿐이다. 베커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이것으로 그는 나중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합리적 선택에 관한 자신의 이론이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직장을 바꾸거나 결혼 또는 이혼을 하거나 뭐든 시작할 때, 베커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 선택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터이므로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고 긴 시간과 많은 돈을 양육에 쏟아붓는가? 여러분은 사랑, 감정, 본능 등을 생각하겠지만, 베커의 합리적 선택 이론에 따르면 사실은 부모가 미래를 위해 현명한 투자를 한 것이고, 결국은 자식들에게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의 교육과 재주에 재정적으로 투자해서 이득을 본다."


경제 이론의 합리적인 이상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증거는 아주 많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도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합리성의 가정은 여전히 현대 경제학적 사고에 남아 있다.


미시간 대학교의 정치 과학자 로버트 액설로드(Robert Axelrod)는 경제학자들이 한 가지 단순한 이유 때문에 합리성 가정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것이 없으면 경제학자들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합리적 선택 자엉의 진짜 이점은 이것이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합리성을 가정하면 논리만으로 이론을 구성할 수 있고, 수고스러운 관찰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개인은 '합리적 선택' 개념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논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여전히 주도적인 개념이고,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공격하기보다는 옹호해야 더 좋은 경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실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의상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람들이 다른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람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에 대한 연구다.


1950년대에 수학자 존 내시는 여러 상황에서 합리적인 사람이 상대방도 합리적이라고 가정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 한 가지가 존재함을 증명했다.


완벽하게 합리적인 투자자는 돈을 잃을 수 있다. 주식 시장은 다른 사람의 믿음에 대한 믿음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도리어 손해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클리블랜드의 기온이 시장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기온이 실제로 시장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현명한 투자자들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멍청해 보이는 일이어도 사고팔기 전에 기온을 확인해 보는 편이 낫다. 합리성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끝내자. 원리적으로도 합리성은 때에 따라서 가끔씩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인간의 또 다른 행동적 습관은 '손실 혐오'이다.




4. 적응하는 원자


심리학자 줄리언 펠드먼(Julian Feldman)의 논의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개 논리를 따르지 않고 단순한 규칙을 사용해서 판단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다.


50여 년 전에 밀턴 프리드먼은 인간의 행동을 연구할 때 정밀한 가정을 바탕으로 이론을 구축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사회를 이해하는 경제학자들의 능력은 부정확한 가정으로 연구할 때 증가된다고 했다.


"진정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가설은 현실을 널리 부정확하게 설명하는 '가정' 위에 구축되며, 일반적으로 이론이 더 중요하면 할수록 가정은 더 비현실적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가설은 작은 것으로 많은 것을 설명할 때 중요하다. 그것은 설명해야 할 현상을 둘러싸는 복잡하고 세밀한 환경의 덩어리에서 공통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를 추상해 내고 그것들만을 바탕으로 적합한 예측을 허용할 때 중요하다. 따라서 중요해지기 위해서는 가설이 가진 가정은 서술적으로 틀려야 한다."




5. 사회적 원자는 흉내쟁이


2005년 8월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지나간 뒤에 뉴올리언스에서는 갱들이 무방비의 여행자들을 덮쳐서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폭스 뉴스는 흉악한 '강도, 강간, 차량 탈취'가 빈발하고 있고, 이재민이 수용되었던 돔 경기장에서 '어린 아기'가 강간당했다고 보도했다. 이 이야기들은 거의 예외 없이 헛소문이었다.


사람들의 모방 성향을 잘 알고 있었던 로마 사람들은 중요한 장례식 때 울음을 유도하기 위해 통곡 전문가를 고용했다.


사람은 펭귄과 그리 다르지 않다. 펭귄들에게는 매일의 딜레마가 있다. 그들은 차가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산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 때때로 범고래가 펭귄을 공격한다. 펭귄은 매우 주의해야 하고, 안전하다고 확신할 때에만 물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일이 꼬인다. 뭍에 있는 펭귄은 범고래가 수면 아래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알아보려면 직접 물에 들어가 볼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참을성 없는 다른 펭귄이 기다리다 지쳐서 뛰어들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펭귄은 범고래 룰렛 게임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몇 시간씩 둘러서 있다 보면 결국 어떤 성급한 펭귄 한 마리가 바다에 뛰어들고, 그때 전체 집단은 전부 뛰어들거나 아니면 아무도 뛰어들지 않게 된다. 바다에 피가 번지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으면, 모두 뛰어들어서 먹이를 찾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때때로 펭귄들은 그리 점잖지 않은 방식으로 이웃을 뛰어들라고 부추긴다.


경제학 이론에서는 아직도 '대표적 행위자(representative agent)'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2%가 소요에 가담한다면, 그것은 이 사건이 2%의 사람들에게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람은 생각만큼 자유롭지 않다.


'단순화'가 핵심이다!


좋은 과학에는 적절한 근사가 필수적이다. 어떤 것에 대한 '완벽'한 모형 따위는 없다. 구도에 포함된 일부 요소들을 무시해야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것에 답할 수 있다.


뭔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중요한 핵심적 세부 사항에 집중한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원자에 접근하고 사회적 원자로 이루어진 세상에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적응적인 문제 해결자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합리적인 계산 기계가 아니라 패턴을 인식하는 존재이며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이 있다. 이것은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무시하지만, 이 단순한 출발점은 앞 장에서 보았듯이 훨씬 더 '정교한' 이론드이 설명하지 못한 금융 시장의 근본적인 특징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가 지적했듯이,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게 놓아두면, 그들은 대개 서로를 흉내낸다. 개인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사회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획일화되는 일이 많다."




6. 협력하는 원자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말했듯이, "현대의 이기심 이론의 안경으로 보면, 사람들이 하는 이런 행동은 행성이 네모난 궤도를 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기주의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아주 일부만을 설명하며, 많은 사람들은 경제 이론가들이 오랫동안 가정한 것처럼 탐욕스럽지 않다. 게다가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의 이타심 같은 것이 진정으로 존재하며, 그것도 아주 흔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속임수가 가능한 상황에서 이기적인 참여자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협력하려면 상황이 반복되어야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우리의 감정이 모든 것을 단번에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말해서, 이타적으로 행동하면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남들을 도와줄 때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남에게 인색하게 굴 때 죄책감을 느낀다. 빚을 갚으면 마음도 홀가분해지고, 악의적으로 나를 괴롭혔던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면 마음이 후련해진다. 어떤 행동이든 주고받을 때, 개인은 외적인 보답뿐만 아니라 내적인 보답까지 고려한다.


한 가지 가능성은 진화를 통해 실제로 이타적인 사람들이 도태되고 있지만, 아직 그 과정이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한 오랜 기간에 비해 현대와 같은 삶의 조건이 갖춰진 기간은 매우 짧다.


실험에 따르면, 속 좁은 이기심만으로는 거대 집단이 협력을 유지할 수 없다. 호혜적 이타주의자뿐만 아니라 이기적인 행위자들이 협력을 구축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이것은 모두 다 소수의 집단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성원의 수가 30명이나 40명이 되면 이런 일은 잊어버려야 한다.


집단 단위의 경쟁에서는 협력적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더 유리하다. 집단 수준의 경쟁은 이기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도태시키고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을 보존한다. 긴티스와 보이드는 집단 수준으 경쟁이 충분히 크면 강한 호혜주의를 가진 사람들의 인구 비율이 높게 유지된다는 것을 보였다. 이타주의자는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 도움이 된다. 협력이 집단의 생존에 더 중요해질수록, 진정한 이타주의가 존재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이타주의는 가장 냉혹한 환경에 대항해서 집단 생존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 발견은 진정한 이타주의가 부적응이 아니라, 사회적 접착제로 작용해서 조상들이 강하고 탄력적인 집단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인류를 성공하게 한 열쇠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7. 왜 우리는 집단주의에 빠지는가?


개인이 가진 이타적인 본성은 역설적으로 집단으로 인해 생겨난다. 개인이 개인을 돕는 행위로만 보아서는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개인들이 뭉쳐서 사회를 이루고 집단 단위로 경쟁한 결과로만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


집단에 대한 가장 명백한 사실 하나는 그거을 정의하고 특징을 부여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954년 오클라호마 대학교의 사회 심리학자 무자페르 셰리프(Muzafer Sherif)와 동료들은 실험을 통해 아무런 기준이나 공통점 없이 완전히 임의로 나눈 집단에서도 경쟁이 일어나면 강한 집단 구별과 집단 내 충성심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국가적인 위기가 닥치면 대통령의 지지도는 언제나 치솟는다. 위기를 맞으면 사람들은 자기 지도자가 무슨 짓을 하든 강한 지도력을 갖고 있다고 여기며, 자연스럽게 외부자와 다른 집단 구성원들을 불신하게 된다.


맹목적으로 집단에 충성하고 집단적 편견에 빠지는 예들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집단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의 태도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리 준비한 편견에만 따르고 다른 가능성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2004년에 조지 부시와 존 케리가 맞붙은 미국 대통령 선거 때, 에머리 대학교의 심리학자 드루 웨스턴(Drew Westen)의 연구진은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에게 자신들의 후보가 명백히 틀린 발언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웨스턴과 동료들은 개인들이 그 모순을 설명하려고 노력할 때의 뇌 활동을 관찰했다. 활성화된 부위는 이성과 관련된 부위가 아니라 감정과 갈등 해결에 관련된 부위들이었다. "본질적으로 당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을 때까지 인식의 만화경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 같았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소속 집단을 보존하고 지지하기 위해 현실을 감정적인 방식으로 여과해서 보는 것 같다.


인간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세부 사항에서 멀찍이 물러서서 어떤 단순하고 근본적인 과정이 작동하지 않나 살펴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세계를 잠시 제쳐 두고 먼저 토머스 셸링의 동전들처럼 과도하게 단순화된 세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언제나 협력만을 바라고 목을 내밀고 있으면 나를 좀 속여 달라고 하는 꼴이 된다.


액설로드와 해먼드의 색깔 게임.


특별한 이유도 없이 중요한 패턴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초기 설정에서 이웃을 대하는 전략이 몇 가지뿐일 때, 편견이 유리하다. 편견은 추악하지만, 인간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효율적이다. 일단 편견(집단 중심주의)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면 놀랍게도 더 협력적인 세계가 만들어진다. 집단 중심주의적 세계에서는 같은 집단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대부분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색깔 게임은 사람들이 조악하고 피상적인 딱지만을 바탕으로 판단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보여 준다. 사실상 색깔 게임은 공포, 강제, 세뇌 또는 어떤 일 때문에 자신의 개성을 잃고 다른 사람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때의 우리 세계와 비슷한 것 같다. 색깔 게임이 제시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는 대부분의 방법을 제거하면, 집단 중심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사람의 이상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민족 중심주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완전히 정상적인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패턴의 문제이다. 평화로운 공존을 지원하는 정교한 사회 메커니즘이 교란되면 사람들은 더 야만적이고 조악한 구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강한 집단적 증오의 주요 원인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 다른 집단들이 어떤 이유로 사업이나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집단 간의 사회적 연결이 무너져 통상적인 사회 역학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혼란스럽거나 내전이나 혁명이 일어나서 건전한 사회적 상호 작용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원시적인 메커니즘에 매달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평판을 알아보기 위해 정교한 판단의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무력해지고 조악한 인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국외자와 외국인,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갑자기 위험 인물들로 보인다.


집단 간의 증오와 불신만으로는 폭력가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적 빈곤만으로는 인종 청소가 일어나지 않는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두 번째 공통점은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민족적 증오를 전략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가 헨리 브룩스 애덤스(Henry Brooks Adams, 1838~1918)에 따르면, 현실 정치는 "무엇을 가장하든, 언제나 체계적인 증오를 조직화하는 데 달려 있다." 이 말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특정 개인은 인간 역사에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이 실제로 그만큼 강하고 지적이거나 카리스마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이 사회 패턴을 조작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 철학자는 역사가 강력한 개인들의 뜻에 좌우되는지, 집단의 '사회적인 힘'에 따라 결정되는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 왔다. 역사가들은 한때 역사를 '위인전'의 집합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개인의 힘보다는 경제적인 힘, 인구 분포, 넓은 문화적 영향력 등을 역사의 구동력으로 보는 쪽으로 더 기울어지고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분명 둘 다 일리가 있다.


집단적인 패턴의 에너지는 개인들에게 거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권능을 주며, 패턴의 논리를 정확히 이해하면 이것을 자기 목적에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개인이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직관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집단적인 힘을 정확히 읽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거대한 권력을 주는 우리 사회의 계층 구조도 흥미로운 대상이다. 집단은 사람들이 정합적이고 조직화된 형태로 결집할 때 능력이 더 커진다. 계층 조직은 이렇게 하기 위한 한 가지 효율적인 방식이고, 권력의 자리에 있는 개인은 몇 마디 말로 다수의 에너지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거대한 힘이 그 개인에게서 나온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집단은 한 사람에게 많은 힘을 주도록 스스로 조직화하는데, 그것은 이렇게 할 때 그 집단이 더 강력하고 적응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도적인 개인의 힘은 조직된 집단에서 나오며, 그가 개인으로서 특별히 위대한 것은 아니다.


개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실용적으로 물리학의 강점은 언제나 어림짐작에 있다. 진짜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고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특수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현실을 그렇게 심하게 단순화하면서도 어떻게 그처럼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는지 우리는 진정으로 모른다. 우주는 쉽게 분해를 허용하는 듯하다. 세계는 의외로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조립되어 있다.




8. 부자 아빠의 음모, 가난한 아빠의 과학


"일반 대중은 오래전부터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한 부류는 과학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부류는 과학이 그렇게 할까 봐 두려워한다." - 딕시 리 레이


음모론적인 설명은 더 안전하거나 심리적으로 더 받아들이기 쉬운 해석을 제시하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파레토에 따르면, 인구에 따른 부의 분포에서, 부 W를 소유한 사람의 수는 W의 a제곱에 반비례한다. a는 2와 1/2쯤 된다. 다시 말해 부가 늘어남에 다라 2와 3의 중간쯤 되는 수의 거듭제곱에 따라 사람의 수가 줄어든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금융 시장의 변동과 똑같은, 이른바 멱함수 분포의 형태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부가 10배 늘어날 때마다 그만큼의 부를 소유한 사람의 수가 1/6로 줄어든다. 예를 들어 1000만 달러를 가진 사람은 100만 달러를 가진 사람의 1/6이다.


0.1밀리미터 두께의 얇은 종이를 25번 접으면 두께는 3킬로미터가 넘는다. 비슷하게 투자에서 이득을 얻을 때 개인의 부는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구 집단 사이에서 거대한 부의 불평등이 일어날 수 있다.


인간 재능의 분포와 무관하게 엄청난 부의 불평등이 생길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돈을 버는 재주가 다 똑같아도 이런 일이 나타난다. 따라서 부자는 단순히 똑똑하거나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부자가 된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통찰은 인간 성취의 거대한 차이가 내재된 재능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논리 과정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하는 많은 연구들과 일치한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경제학자 할 배리언(Hal Varian)이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단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와 아주 비슷하다."


몇 해 전에 브루킹스 연구소의 사회학자 로버트 액스텔(Robert Axtell)은 미국에서 영업 중인 영리 기업 500만 개 이상에 대해 통계 분석을 수행했다. 그는 규모(매출액 S 기준)별 회사의 수에서 놀라운 멱함수 패턴을 발견했다. 매출액이 S인 회사의 수는 단순히 1/S제곱에 비례했다. 이것은 매출액이 100만 달러인 회사의 수는 매출액이 200만 달러인 회사보다 정확히 네 배 많고, 또 매출액이 200만 달러인 회사의 수는 매출액이 400만 달러인 회사보다 정확히 네 배 많다는 뜻이다. 관심사와 재능이 다른 수백만의 사람들이 회사에 들어가서 함께 일하는데, 놀라운 단순성을 가진 수학적 패턴이 출현한다.


우리는 대개 비즈니스에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인물과, '잔인한' 결단을 내리는 역량과 '적극적인' 경쟁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상투 어구는 끝이 없다. 그러나 경쟁력을 가진 현대 기업들을 보면, 협력이 낳는 사회적 응집력이야말로 성공의 원척으로 보인다. 장기간 동안 잘 되는 회사는 구성원들의 협력 정신을 계속 유지하고, 그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잘 된다. 현대 기업의 중심에는 인간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있는 것이다.




9. 우리는 아는 만큼 나아간다


흄과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도 인간이 언제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날 애덤 스미스는 엄격한 개인주의의 원조 옹호자로 묘사되지만, 그는 건강한 사회 질서가 "우리가 남들을 위해 많은 것을 하고 자기를 위해서는 조금 한다고 느낄 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흄이 사회적 원자의 특성에 집중한 반면에, 스미스는 그러한 원자가 상호 작용을 통해 어떤 사회적 결과를 가져오고,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더 주목했다.


애덤 스미스는, 사람들이 본래 이성보다 욕망의 지배를 더 받으며, 감정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바람직한 결과를 낳도록 하는 방법을 이해해야만 사회 개선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행동한 결과로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인종주의가 없는데도 공동체가 인종 집단으로 저절로 쪼개지는 것을 보았고, 문명 국가에서 사람들이 이웃과 친구를 흉내 내는 것만으로(유행하는 신발을 사는 것처럼) 출생률이 뚝 떨어지는 것도 보았다.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이타주의가 차갑고 야수적인 집단 경쟁과 전투에서 나왔다는 것도 보았고, 이 오래된 역사가 현대 기업들의 성장과 사멸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보았다.


패턴과 법칙들에 대한 통찰을 얻고 나면, 인간은 신비롭고 이상할 정도로 합리적인 신 같은 존재라는 오만과 망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인간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펭귄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서로 모방한다. 자기와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서 가치 있는 정보를 배우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 따르면 우리의 지성은 정확한 계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학습하고 적응하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학습하고 적응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문제를 푼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문제를 푸는 재주이다. 서로 돕는 것을 배우거나, '좋은 수'를 아는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호 작용을 통해 사회적으로 결속하고 복잡한 연결망을 구축해서 집단을 부분의 합보다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이 풍부함은 어느 한 개인의 풍부함 덕분이라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그들의 생각, 작용과 반작용의 어울림이다.


"물리 법칙은 일반적으로 순수 사고만으로 발견할 수 없고, 실험적으로 발견되어야 한다. 자연은 미시적인 규칙에 따라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일반적인 조직화의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 - 로버트 로플린(Robert Laughlin, 1950~), 노벨 물리학상 수상.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정직한 노력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사람의 힘을 늘리는 것은 소유물이 아니라 진리 탐구이며, 이것을 통해서만 인간의 완성에 끝없이 다가갈 수 있다." -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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