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
과학적으로 보자면 더욱 가치가 없다.
- 생물학적인 진화는 '사회'의 동질성을 지키는 인간의 역사 시간 안에서 일어날 만큼 빠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즉, 저런 뻘짓을 하든 말든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 사회적으로 유용한 듯이 보이는 진화가 반드시 생존에 유용한 것은 아니다.
- 예를 들어 흔히 이런 우생학에서 추종하는 큰 키, 우람한 근육 같은 요소는 사회적으로는 멋지게 보이겠지만 유지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니 생물학적으로는 꼭 유리한 요소라고 보기 어렵다. '잘생긴 얼굴' 같은 요소는 각 시대마다 미적 감각이 달라지는 점에서 지극히 주관적인 요소이며 더욱이 생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 우생학에서 추종하는 인간의 주요한 특징인 거대한 두뇌 역시,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며 출산에 큰 부담을 준다는 점에서 '생존'이라는 관점에서는 반드시 유리한 특성 만은 아니다.
- 애초에 사회가 진화한다는 이론 자체는 문명 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에 아무런 정보도 주지 못한다. 마치 진화론이 약육강식을 정당화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 같다. 사회가 환경에 맞게 변화한다고 해서 좋아진다는 것은 아니다.
허버트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범우주적인 법칙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사회학은 사회의 진화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허버트 스펜서는 다윈의 생물진화론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단순한 상태에서 진화하여 더욱 복잡한 형태로 된다고 보았다.(그러나, 생물진화론에서 복잡한 생물체가 진화하여 단순한 형태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또한,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생물이 진화하면서 몸의 기능이 분화하거나 통합하는 것처럼, 사회도 발전하면서 그 기능이 분화하거나 통합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생물진화론의 적자생존처럼, 사회도 적자생존의 원칙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기존의 사회 이론과는 크게 다른 점이 많은데, 이는 사회진화론에서 다윈의 생물학 이론이 사회학에, 그것도 엉터리로 해석되어 적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사회진화론은 월터 베젓 등과 같은 학자들에게 연구되었고 다양한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진화론은 영국, 독일, 미국 등에 알려졌으며, 실제제국주의의 정당화, 소수 자본가의 독점, 나치즘 등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으며 이에 창조론을 옹호하는 이들은 사회진화론이 나치당이 힘을 갖게 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 이데올로기였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사회진화론이 미국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44년 미국 역사학자인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저서 《Social Darwinism in American Thought》때문이었으며, 그 이후 사회진화론을 분석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들은 주로 사회진화론을 옹호하는 견해보다는 비판하는 시각이 강했다. 또 교육, 사회, 정치, 경제 등의 학문이 발전하게 되면서 사회진화론의 이론 구조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1]